
| [리뷰 : 개봉작] <양양>: 이름을 새기는 카메라 | 2025.10.1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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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 이름을 새기는 카메라 ○ 글 : 차한비 (리버스 기자)
어떤 딸들은 아버지를 카메라 앞으로 데려간다. 이제 딸에게 카메라는 새로 익힌 언어이자 가장 자기다운 목소리이기에, 렌즈를 통해 아버지를 바라보는 것은 단순한 기록 행위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아버지와 딸이 공유한다고 믿어 온 세계, 그들이 속한 역사와 가부장적 질서를 의심하는 일이다. 딸은 고요히 렌즈 너머를 응시하다가 돌덩이 같은 질문을 던지는가 하면, 떨리는 손으로 아버지에게 두툼한 편지봉투를 내민다. 양주연 감독의 장편 데뷔작 <양양>에도 그러한 대화를 간청하는 몸짓이 깃들어 있다. 어느 겨울밤, 술에 취해 전화를 건 아버지는 난데없이 죽은 누나 이야기를 꺼낸다. 이전까지는 존재조차 몰랐던, 젊은 나이에 스스로 생을 마감한 고모 양지영. 오랫동안 가족 사이에서 삭제되다시피 한 존재를 발견하며 의문에 휩싸인 감독은, 결국 그녀의 이름이 왜 사라졌는지 묻고자 카메라를 든다.
‘없는 사람’을 찾아가는 여정 <양양>은 기억의 복원극이자 추적극이다. 감독은 오래된 사진과 편지, 증언을 모아 고모의 흔적을 좇는다. 대학 동창과 옛 친구를 찾아가 조각난 말을 이어 붙이고, 계절마다 아버지를 카메라 앞에 앉힌다. 아버지는 고모의 삶과 죽음에 관해 들려줄 수 있는 증인이지만, 카메라 앞에서 몸과 마음의 불편함을 좀처럼 감추지 못한다. 그는 마치 벌받는 사람처럼 인터뷰를 서둘러 해치우겠노라 하고, 막상 대화를 시작하면 말끝을 흐리기 일쑤다. 고모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시선을 피하고 어깨는 움츠러든다. 그렇다고 카메라 건너편에 마주 앉은 딸이 벌을 주는 입장인 것도 아니다. 감독 또한 편안하지 못한 얼굴로 미간을 움찔하면서도 내내 말을 삼킨다. 그렇게 한숨을 목구멍으로 밀어 넣기만 몇 차례 반복했을 무렵, 고모 양지영을 집안에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야 했던 이유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오랜 금기를 두드리는 일은 누구에게나 낯설고, 종종 잔인하다. 다만, <양양>은 은폐된 진실을 폭로하거나 고발하는 데 목적을 두지 않는다. 영화는 가족 내부의 침묵을 해체하고 사적 기억을 공적 발화로 바꾸려는 시도에 가깝다. 부녀는 벌을 주고받는 관계로 귀결되지 않으며, 그들의 대화는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세대·성별·역할·경험 등의 간극을 넘어 이해에 가닿으려는 과정으로 기록된다. 고모의 유품이 온전히 보존되지 않은 이유를 묻자, 아버지는 체념하는 투로 답한다. “다 없애버릴라고 그랬지. 보면 생각나니까.” 그 말은 상실을 회피하며 버텼던 가족의 지난 시간을 짐작하게 한다. 물건을 버리고, 이야기를 금하고, 가능하면 생각하지 않는 것. 떠난 이를 추억하고 기리는 모든 행위를 금지당하자 기억은 거기서 멈춘다. 아버지의 머릿속에 남은 누나 또한 마찬가지다. 칼로 베어내듯 한 존재와 작별해야 했고, 기억의 절단면은 시간이 갈수록 마모되어 본래 모습을 잃는다. 누나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떻게 살다가 왜 죽었는지 점차 희끄무레해진다. 제대로 말해지지 않은 슬픔은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으로 자리 잡는다. 그러다 아무래도 딸이 너무 많이 배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이미 자신의 품을 한참 벗어났다고 느꼈을 때, 그도 아니면 딸의 얼굴에서 오래전 누군가와 엇비슷한 표정을 목격했을 때 아버지는 공포에 못 이겨 술기운을 빌린 것인지도 모른다. 떠난 이를 잊으려 애쓰는 사이, 남은 이들은 과거에 갇힌다. 감독은 “너는 자살한 고모처럼 되지 마라” 당부했던 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동시에 언급되지 않은 이름을 불러내고 봉인된 자리를 카메라로 열어젖히며 그 정지된 시간을 다시 움직이려 한다.
서로를 잇는 이야기 <양양>의 형식적 완성도는 추적을 시각화하는 방식에서 드러난다. 고모에 관한 정보는 아무리 그러모아도 부족하고, 한 사람을 둘러싼 묘사는 곧잘 충돌한다. 영화는 다양한 자료를 활용하는 동시에, 각각 단절된 채 떠도는 이야기를 애니메이션으로 연결한다. 사방으로 뻗으며 공간감을 만들어 내는 이미지와 숨 쉬듯 흔들리는 선들은 사실 자체가 아닌 감정을 뒷받침한다. 이는 미지의 인물을 형상화할 뿐만 아니라, 그가 마주했을 풍경을 짐작하고 상상하도록 돕는다. 즉 애니메이션은 현실의 부족을 메우기보다 결여를 시각화하는 장치로 활용된다. 그 공백 속에서 관객은 고모의 삶을 추측하는 동시에 감독의 고민을 듣는다. 내레이션은 또 다른 층위에서 영화의 정서를 이끈다. 그것은 감독의 목소리이자 ‘주연’이라는 인물의 내적 독백이다. 주연은 때때로 고모에게서 자신을 겹쳐보지만, 한편으로는 영영 풀지 못할 수수께끼를 맞닥뜨리기도 한다. ‘고모가 이걸 원할까? 고모가 알면 좋아할까?’라는 질문을 거듭하며, 영화는 ‘대신 말하기’와 ‘함께 침묵하기’ 사이의 윤리적 거리를 탐색한다. 확신보다는 주저함, 단정보다는 망설임이 <양양>의 리듬을 이루는 셈이다. 그렇게 고모를 찾아가는 여정은 곧 감독 자신의 궤적으로 연결된다. 영화는 점차 ‘그녀를 위한 이야기’에서 ‘우리를 위한 이야기’로 확장하고, 감독은 가족사를 넘어 자신이 몰두해 온 여성 서사를 되짚는다. 첫 단편 <양동의 그림자>(2013)에서 만난 성매매 여성, <내일의 노래>(2014)로 따라간 비정규직 노동자, <옥상자국>(2015)에서 5.18의 역사와 나란히 담은 할머니까지. 감독의 관심은 늘 서사의 권력을 갖지 못한 이들에게 향했고, 그 속에서 인물이 지닌 고유성과 특별함을 포착해 왔다. <양양>은 그처럼 긍지를 나누었던 순간을 되새기며 고모를 포함한 가족 안팎의 여성에게 말을 건다. 딸, 아내, 엄마, 며느리 등의 역할에 이름을 내주어야 했거나 그럴까 봐 불안했던 시간으로 카메라를 옮겨 간다.
이름을 새기며 다시 쓰는 세계 안개처럼 흩어지는 기억, 불충분한 증언 속에서 고모를 완벽히 복원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이 여정이 의미 있는 이유는, 한 여성을 기억하는 일이 결국 자신을 다시 쓰는 일이기 때문이다. <양양>은 고모를 죽음과 불행, 연민으로 환원하지 않는다. 영화가 주목하는 것은 비극적 결말이 아니라 삶의 과정이다. 유난히 공부 욕심이 컸던 소녀,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지 못한 딸, 원치 않는 관계를 중단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써야 했던 여자,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길을 찾으려 분투하던 학생,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던 청춘. 이는 고모에 관한 설명이자 수많은 여성이 공유하는 이야기다. 영화는 서로 다른 세대의 여성들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그들의 목소리가 단지 계승되는 것이 아니라 공존하고 공명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영화 후반부, 감독은 아버지에게 가족 묘비에 고모 이름을 새기자고 제안한다. 망각과 회피를 넘어 직면과 감당을 택하자고 청하는 것이다. 단단한 암석에 ‘지영’과 ‘주연’을 나란히 새기는 순간, 그간의 믿음은 균열을 맞고 새로운 관계가 태어난다. 〈양양〉은 그렇게 고모의 자리를 되찾는다. 그러나 고모 대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끝내 닿지 못할 거리와 여백을 끌어안으며, 전부 알 수 없다는 자각이 오히려 사랑을 탐구하고 표현하는 또 다른 방식이 될 수 있음을 설득한다. 고모를 대신하지 않되 고모와 함께하며, 감독은 그 곁에서 “불편한 것도 나눌 수 있는 시끄러운 가족”을 만들고 싶다고 목소리를 낸다. 그리하여 카메라를 든 딸은 가족의 비밀을 파헤치는 탐정이 아니라, 기억과 이야기의 윤리를 고민하며 제 세계를 다지는 작가로 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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