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 개봉작] 과거의 유산, 과거라는 유령 앞에서 <장손>이 택한 거리감에 관하여 | 2024.09.24 | |
|
||
<장손>이 택한 거리감에 관하여 ○ 글 : 정지혜 (영화평론가) *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오정민의 데뷔작 <장손>(2024)은 4대에 걸친 한 집안의 생활사를 조망하고 가족의 육체적, 물리적, 심리적 생로병사를 우직하게 세공해 냈다. 특히 이들 가족의 생애사는 한국 근현대사의 압축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영화 속 인물들이 겪어온 세월의 스펙트럼은 넓고 개인사의 내적 강도는 높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을 겪고 자수성가한 조부모 세대, 민주화 투쟁과 학생운동을 경험한 386세대의 좌절된 꿈의 담지자 부모 세대, 앞선 세대의 문법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제 꿈을 좇는 자식 세대, 그리고 이제 막 태어난 미지의 4대까지. 굵직한 시대상을 좌표 삼고, 각 세대의 대표적인 상태를 표상하며, 서울 중심이 아니라 지방에서, 지역색을 살리며 가족 경영으로 생계와 살림을 이어가는 일가의 일대기를 세 개의 계절을 통과하며 보여준다는 점에서 <장손>은 오정민의 야심 찬 가족 드라마이다. 전통적 의미의 가족관과 형태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으며 그 자취를 감춘 지 오래인 이 시대에 독립영화가 천착하고 있는 가족의 초상은 이와는 사뭇 다르다. 종래의 가족극은 모녀, 부녀, 자매 등 특정 관계의 역학이나 개별 인물, 즉 단독자의 욕망과 그 양상, 발현에 더 강하게 이끌려왔다. 비혈연 관계를 통해 가족을 재구성하거나 퀴어의 파트너십 혹은 공동체로서 가족을 새로이 상상하는 일이 가능해진 것이다. 그런 흐름 속에서 <장손>의 가족은 드문 사례다. 가족 앙상블과 관계사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장손’이라는 말이 지시하듯, 영화는 집안 대대로 이어지는 남성 가부장들의 면모, 그것도 불화와 갈등을 만들어 내는 그들의 문제적이고 지배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이 집안의 아버지 남성들에게는 각자의 두려움과 설움이 깊게 서려 있는데 그것은 일종의 심리적 트라우마로 병리적으로 발현되곤 한다. 장손 성진(강승호)의 할아버지 승필(우상전)은 어느 시점 이후부터 치매 초기 증상이 의심되는데 그런 상태로 그가 하는 말의 대부분은 레드 콤플렉스와 죽음 공포에 관한 것이다. 한편, 성진의 아버지 태근(오만석)은 아버지를 향한 불만과 자격지심, 울분과 울화로 감정 조절 능력을 잃을 때가 종종 있으며 술주정은 과격하고 무시무시하게 폭발하기에 이른다. 앞선 남성들과 비교하면 성진은 온순하고 조용하기 그지없다. 다르게 보면, 그는 이 병리적 발현을 보이는 남성들을 이겨내거나 돌파할 만한 에너지를 갖고 있지 않다. 그는 가만히 듣거나, 가까스로 말리거나, 마지못해 나서거나, 잠시 자리를 뜨거나, 그것도 아니면 새벽같이 서울로 떠나버린다. 그런데 성진의 이 수동적 피신과 외면이야말로 이 가족의 근본적인 상태와 닮아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장손>이 일관되게 취하는 태도이다. 바로 그러하기에, <장손>의 카메라는 문지방을 넘어설 수 없다고, 그 앞에서 오히려 더 멀찍이 떨어져 있기를 자처하고 나서는 것이다. 인물들이 집 안에 있을 때, 그들 중 일부는 이미 열린 문 너머 안쪽 방에 있고, 가족의 또 다른 일부는 그 바깥쪽, 문 너머에 있다. 누구도 그 문을 성큼 넘어서는 일이 없다. 카메라 역시 마찬가지다. 문지방으로부터 한참 떨어진 외부에서, 저 문 너머에서 일어나는 사태의 일부만을, 상황의 당사자들의 부분만을 보여주거나 지켜보거나 그들의 말을 전하거나 들을 뿐이다. 열린 문은 문 안쪽에 있는 사람들이 더 이상 문밖으로 새 나가길 원치 않는 자신들의 말을 차단하거나 안쪽의 필요에 따라 안쪽으로 닫힌다. 반대로, 닫혀 있던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그 바깥으로 나온다고 한들 방금까지 있었던 문 안쪽의 상황은 바깥의 사람들과 공유되는 법이 없다. 카메라는 그 안쪽으로 들어가거나 입회하기를 고집스럽게 거부한다. 심지어 할머니 장례식장의 한쪽 방에서 조의금을 계산하는 가족들을 지켜보던 카메라는 방의 끄트머리에서 얼마간 머무는 듯하다가 결국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지 않았던가. 조심스럽게 유지하는 이 넘어설 수 없는 거리감에서는 사태의 전모를 밝히려는 적극적 개입이나, 난입을 무릅쓰고서라도 감행해야 하는 우격다짐이나, 전체를 아우르는 조망의 시선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대신 이러한 조심성에는 자기보다 앞선 세대의 가족 앞에서 자신이 무엇을 더 할 수 있겠는가, 뭔가를 더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하는 일종의 파탄에의 두려움, 체념 어린 수긍, 수동적 수렴 상태가 짙게 감지된다. 이것이 곧 장손 성진의 입장이기도 하다. 대가족의 서사와 인물군을 그리려는 이 영화의 외양적 야심과는 다르게 결정적인 인물의 기질은 온순하며 돌파가 아닌 우회로를 찾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이 가족에 갈등이 일어나고, 큰 소리가 나기도 하며, 그 과정에서 집 한 채가 완전히 태워질 정도의 큰불이 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벌어진 사태의 심각성에 비해 영화는 의외로 담담하고 고요하며 위태롭게 느껴지지 않는다. 거리감이 만들어 낸 조심성은 가족 구성원들을 끝내 서로의 내부로, 심연으로, 사태의 진상과 진실 앞으로 데리고 들어가지 않은 채 일단락에 이른다. 할머니 말녀(손숙)의 죽음 이후, 행방이 묘연해진 곗돈과 큰고모 혜숙(차미경)의 돈의 행방은 어떻게 됐는가. 혜숙이 기거하는 집의 불은 누구의 탓인가. 혹은 어떤 이유로 일어났을까. 의심의 순간과 의뭉스러운 말은 이대로 접어두면 되는 것일까. 끝내 그 개별 사안과 연루된 이들의 잠정적 결론은 알 길 없다. 가족의 내부로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그 가까이 가는 것을 주저하는 것은 아닐까. 그 거리감, 그 조심성을 깨뜨려 보려는 한 번의 중요한 시도가 있다. 할아버지 승필과 손자 성진이 한 방에 누워 잠을 청하는 장면이다. 내내 등을 돌리고 모로 누워 있는 승필과 그 등 너머의 성진. 정신이 또렷하지 않은 상태로 보이는 승필은 성진을 아들 태근이라고 착각한 채로 제 부모의 비극적 죽음과 살아남은 자신, 가족을 향한 자부심에 관해 말하기 시작한다. 바로 그때, 성진이 낯설고 이상한 시도를 감행한다. 자신이 마치 아버지 태근인 것처럼 구는 것이다. “아버지요.” 승필을 부르는 소리에 이어서 성진은 태근이 아버지 승필에게 평생을 두고도 한 번도 묻지 못했거나 묻지 않았을 질문을 던진다. 이 집안의 내밀하고 비밀스러운 역사가 처음으로 외화되고 발화되는 순간이다. 이어지는 승필의 대답, “니는 내처럼 살면 안 되니까.” 이것은 자기 부정인 동시에 다음 세대를 향한 간절한 소망의 말일까. 그것은 끝내 수신인 태근에게는 가닿지 못한 채 한 세대를 건너뛰고 성진에게로 미끄러져 도착한다. 그 말 역시도 정확하게 대면해 전달되는 게 아니라 등을 돌린 자와 등을 바라보는 자의 구도로, 아픈 자 혹은 미몽 속에 있는 자의 입으로 어렴풋이나마 시도되는 것이다. 이때 가족의 비밀과 진실, 누군가의 심중의 말 혹은 꿈결 속의 말을 유일하게 들을 수 있는, 그 자리에 있는 이는 장손 성진뿐이다. 그는 조부모의 조건 없는 사랑과 물질적 유산의 정확한 수혜자이자 상속자이기도 하다. 조용한 관찰자가 되기를 자처한 성진에게로 수렴되는 유산이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가족, 그 안에 웅숭그리고 있는 갈등의 씨앗은 그대로 저곳에 있다. 바로 그러하기에, 그것에 빚지고, 그 유산에 기대어 성진은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는지도 모른다. 과거의 빛과 그림자, 과거의 유산, 과거라는 유령은 여전히, 또 얼마간, 아니, 어쩌면 이후에도 오랫동안 현재와 현세대에 어른대고 있는 게 아닐까. 앞선 한 세대가 물리적으로 퇴장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들이 남긴 역사, 흔적, 물질은 쉬이 사라지지 않고 유유히 이어지곤 한다는 것을 현실의 감각으로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 크든 작든 그 세례를 받을 수 있는 자, 누구인가. 이 질문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으며, 여전히 유효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