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미끄럼틀의 도착지는???
내가 외울 수 있는 가장 긴 숫자가 도어락 비밀번호였던 때였다. 발끝을 오므리게 되던 추운 겨울날. 현관문이 열리지 않았다. 고작 10살에게 닥친 재난이었다. 맞벌이 부부에게 도어락 배터리 잔여량 확인은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전화사서함으로 연결 된 지 2시간이 지나고서야 수화기는 응답했다. 엄마가 잘 아는 이웃 아주머니의 손에 열린 문 너머의 정경이 아직도 선연하다. 낯선 채광과 알록달록 옷가지. 생전 맡아보지 못했던 계피향. 내 키보다 높은 화분들. 카라멜을 닮은 네모난 소파. 웜홀을 타고 다른 세계에 떨어진 것처럼, 문이 열린 그곳에서 나는 이방인이 되었다.
해외 출장으로 잠시 떠난 엄마와 회사원 아빠 사이의 9살 ‘지수’도 현재 매우 당혹스럽다. 유일하게 함께 놀던 친구가 사라졌다. 그것도 바로 눈 앞에서. 놀이터에서 같이 놀다가 미끄럼 틀을 내려가고 난 뒤 자취를 감춘 것이다. 경찰까지 대동되었던 일은 그저 해프닝으로 마무리된다. 아이의 시선에서 갑자기 사라진 것들은 어디로 향했던 걸까. 생각해보니 미끄럼틀은 일종의 비행기 혹은 셋을 세면 잠시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타임머신이었다.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하고, 안전하게 몸을 피할 수 있는 공간에서 엄마도 쉬다 온 거였을까? 문득 예전 우리 동네의 빨간 미끄럼틀이 생각났다. 그때의 엄마와 아빠에게 전하고 싶다. 그 웜홀에 들어가지 마세요.